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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경수 김종대
Antifreeze
*
아침에 눈 떠보니 종대가 없었다.
옆자리가 아직 미지근하니 온기가 남아있는 걸로 봐서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긴 한데, 종대는 뭐만 했다 하면 사고를 치기 일쑤라 잠시도 눈을 떼면 안 된다. 심술이 났지만 말없이 슬리퍼를 꿰어 신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두꺼운 옷을 걸쳤다. 침실을 나가면서 힐끗 본 창밖은 어둑어둑했다. 늘 그렇듯이. 아마 밤새 내린 눈이 가득 쌓였을 것이다. 그냥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가려다가 침대 위의 베개를 집었다.
“경수 일어났어어?”
“넌 아침부터 기운도 좋다.”
반쯤 감긴 눈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니 종대가 화색을 하고 나를 반겼다. 아, 쟤 또 헐벗고 있어. 실내 온도가 이렇게나 낮은데 종대는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게다가 슬리퍼도 안 신고. 완전무장을 한 나도 이렇게 추운데. 내가 또 잔소리를 하려는 걸 알았는지 종대가 선수를 쳤다.
“나 아침 만들고 있었어.”
“그래.”
“나 물 조절 완전 잘했어.”
저건 불안하니까 봐달라는 뜻이다. 얘는 왜 하지도 못하는 요리에 꾸준히 도전하는 걸까? 날 암살하려고? 등 뒤로 베개를 감추고 계단층에 서서 손짓으로 종대를 불렀다.
우리는 짝꿍이다. 짝꿍이라는 말이 이상하긴 한데 별달리 표현할 말을 모르겠다. 어른들은 우리가 서로의 반려라고 말하지만 종대가 그 말은 어쩐지 너무 형식적인 것 같다고 말한 이후로 나는 그 말을 안 쓴다. 그러니까 그냥, 짝꿍이라고 부르자. 나는 내게 달려오는 내 짝꿍의 앞으로 들고 있던 베개를 들이밀었다. 종대는 나를 안으려다가 베개에 가로막혀 푸푸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렇다. 내 짝꿍은 바보다.
*
태양과 달과 지구.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고장 난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달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끼어들었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지만 그건 정말 걱정해야 할 일이었다. 곧 지나갈 거라 생각했던 일식은 지나가지 않았고, 지구의 공전은 멈춰버렸다. 지구와 달 중 하나라도 좀 움직여주면 문제가 해결될 텐데 둘 다 황소고집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 움직여서 이제 다 귀찮아진 건지 문제는 10년이 지나도록 해결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일식 상태로 10년째 살고 있다는 얘기.
나로 말하자면 다섯 살 때 까지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사람으로, 근엄하신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 망할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한국 땅 어딘가의 중학교를 다니고 있겠지만 현실은 그런 거 없고, 어쩐지 베이비시터 일을 하고 있다.
“경수야,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그럼 나가서 눈 퍼먹어. 널린 게 눈이구만.”
“…….”
“왜.”
“경수 미워!”
내가 돌보는 아기가 나랑 동갑인데다 응석도 어리광도 많고 또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그래. 나는 그냥 베이비시터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눈에서는 아무 맛도 안 나잖아. 먹기 힘들다구.”
“뭐가 힘듭니까? 힘들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씨이, 경수 진짜 미워!”
종대에게 나는 하루에도 몇 십번씩 미운 놈이 된다. 한번은 그 미운 놈 소리가 듣기 싫어서 각 잡고 상냥하게 대해준 적이 있는데, “왜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 너는 나랑 하고 싶은 게 아무 것도 없어? 나랑 있는 게 지루한 거지? 경수 미워!” 하는 찡찡거림을 한 바가지 배부르게 얻어먹은 후로는 그냥 포기했다. 내 멋대로 산다. 이래도 미운 놈, 저래도 미운 놈일 텐데 뭐. 네, 제가 바로 이 구역의 미운 놈입니다.
살고 있는 환경이 변하니 자연히 전에 없던 질병도 생겼다. 극심한 신종 바이러스로 유아 사망률이 엄청나게 치솟은 데다 점점 낮아지기만 하는 기온 때문에 인구가 훅 줄었다. 인공조명으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긴 하지만 이전의 지구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나야 태양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으니 차라리 다행이지만,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설상가상으로 출산율은 바닥을 치는 것으로 모자라 땅을 파고 들어가고 있다. 아기를 기르기에 척박한 환경 탓도 있지만 이런 세상에 후손을 남기고 싶지 않아하는 심리도 작용한다고 뉴스에서 그랬다.
점점 줄어드는 인구에 대한 대비책으로 세계 정부는 인류 보존 계획을 세웠는데, 거기서 나온 것이 바로 ‘반려 제도’였다.
결혼도 육아도 강요하지 않는다. 수정, 착상, 태아의 성장도 인공 자궁이 책임진다. 다만 유전적 다양성을 추구한다. 다양한 유전 정보가 없으면 언젠간 인류가 싸그리 멸종하고 말테니까. 세계 정부는 사람들에게 번호를 부여해 그들이 성인이 되면 유전자를 기증하도록 했다. 성별 상관없이 가장 이상적인 유전자 조합을 찾다보니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짝지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덧붙여 그렇게 짝지어진 사람들끼리 결혼을 할 경우에는 보다 나은 거주 환경을 약속했다. 덕분에 유전자 검사 결과로 맺는 반려 제도는 그럭저럭 자리를 잡았고, 종대와 나도 그 반려 제도로 인해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일곱 살이었는데, 나는 반려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다. 종대가 도착할 즈음에는 어머니가 사탕을 주셔서 사탕을 먹으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 애가 아니었고, 다들 그런 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게 긴장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사탕을 와그작와그작 다 깨물어먹었을 때 방으로 들어오는 커다란 문이 살짝 열렸다.
저것은 곰인가. 종대에 대한 내 첫인상은 그거였다. 곰. 종대는 자기 몸보다 더 큰 곰 인형을 안고 들어왔다. 심지어 곰 인형에 거의 가려진 채로. 사실 저 곰 인형이 본체고 저 남자애가 인형 아닐까. 어렸지만 공상 과학 영화의 충실한 팬이었던 나는 그 때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엄청 귀여워서 좀 설렜다. 왜 사탕을 혼자 다 먹어버렸나 후회도 했다. 첫인상은 그토록 좋았고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 이후 나의 삶은 김종대가 곰이 아니라 여우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쓰이게 된다. 아, 도경수 이 불쌍한 새끼.
종대가 눈에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더니 밖에서 눈을 퍼먹고 있었다. 산성눈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보통 정말 눈을 퍼먹지는 않잖아. 야무지게 오렌지 농축액까지 준비해서 눈밭에 뿌려먹는 김종대 때문에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기분이 들었다.
“김종대.”
“왜애?”
여우같이 끝을 늘이는 대답은 참 또 기가 막히게 잘 한다. 그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지? 맞아. 사실 좋아해. 더 해줘.
“너랑 나는 짝꿍이잖아.”
“웅.”
“그러니까 언젠가는 너랑 나랑 유전자를 섞어서 아기를 만들 거라는 얘기잖아.”
“그런데?”
“그런데 네 유전자를 이 지구상에 남겨도 될 지 확신이 안 선다.”
아 왜애애애애애애! 풀 파워로 끝을 늘이며 징징대는 김종대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으며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대체 어딜 봐서 우리가 이상적인 조합이라는 거야? 아무리 다양한 유전 정보가 필요하다고 해도 이건 잘 모르겠다. 이렇게 엉뚱한 조합이 인류 번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진심으로??
(미완성ㅠwㅠ)
*
지금까지 세계 정부는 빙기가 왔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평균 기온이 낮아지고 겨울이 길어졌지만 그건 ‘태양빛이 부족해져서 그럴 수도 있다’는 견해로 몇 년을 버텼다. 그러다 오늘, 결국 모두가 빙기를 인정했다. “앞으로 지구는 얼어붙을 겁니다. 사실 일식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죠. 정부가 내놓은 빙기 대비책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암울한 소식에 덜컥 불안해졌다.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무서워할 일은 아니다. 정부는 대책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도 빙기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당장 종대와 내가 사는 이 집만 해도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집이니까. 그런데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였나 싶게 두려움이 앞섰다. 바보처럼.
앞으로 어쩌지. 걱정에 TV를 끄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더니 저만치서 혼자 놀던 종대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평소 같으면 장난에 조금이라도 어울려줬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정말로 걱정스러웠다. 그러다, 간신히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친 맑은 눈동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가 종대를 지켜줘야 하는데.
처음부터 그랬다. 김종대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같이 불안해서, 동갑인데도 나는 항상 종대를 챙겼고 보살폈다. 하지만 앞으로 빙기가 와서 전부 얼어붙어버려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 말에 종대는 입술을 꾹꾹 깨물며 조용해졌다. 옷자락만 괜히 구기고 있는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데 종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우린 괜찮을 거야.”
“하지만…”
“우린 괜찮을 거야. 나 안 지켜줘도 돼. 아니, 지켜주고 싶은 만큼만 지켜줘. 그렇게 하고나면 내가 널 지켜줄게. 우린 짝꿍이니까.”
다정하게 손을 잡아오는 종대 때문에 열이 확 올랐다. 방금까지는 정말 추웠고,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지만 갑자기 뜨거워졌다. 뉴스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나는 우습게도 점점 평온을 찾았다. 차분해지고 따스해졌다. “경수 얼굴 빨개졌어.” 종대가 남은 한 손으로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덕분에 눈만 됴르륵 굴리며 무슨 말을 할지 한참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고 체온이 상승한다. 기분은 느긋해지고 긴장이 풀린다. 일식 없이 태양이 멀쩡히 떠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마음이 따스했을까.
“그러니까 빙하기 끝날 때까지 사랑해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곰곰 생각해보고 있었다. 얘가 지금 나더러 사랑해달라고 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멍하니 있으려니까 여우같이 얄미운 입술이 내 뺨에 와서 영역 표시를 했다. 쪽,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시 쫑쫑 멀어지는 종대를 눈으로 쫒았다. 볼에 닿았다 떨어진 몰캉한 감촉이 뜨겁다 못해 홧홧했다.
내가 은근히 무시하고 있던 이 멍청한 반려 제도는 사실, 완벽했었나 보다. 멀어지는 마른 등이 그걸 알려주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로는 반려. 우리가 하는 말로는 짝꿍. 지구가 얼어붙어도 네가 곁에 있으면 난 막 뜨거워질 거야.
아마 엉망진창일 얼굴을 쓱쓱 비비고 어딘가로 팔랑팔랑 가는 종대를 따라갔다. 걸음이 빨라지는 걸 보니 내가 따라가고 있다는 걸 아는가 보다. 그래봤자 아직 젖살이 통통한 뺨이 다 보이는걸. 나만 얼굴 빨개졌냐, 너도 빨개졌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 끝이 사랑스러웠다.
아까 나를 위로하던 손을 이번에는 내가 잡았다. 위로가 아니라 애정을 담아서.
“김종대 가만히 있어. 천국을 보여줄 테니.”
“으.”
나름 필살기라고 내뱉은 멘트였는데 어째 하나도 안 먹혔다. 종대는 벌레 씹은 표정이 되더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래봤자 종대 뒤에는 벽 밖에 없다.
“나는 위로도 해줬는데 이상한 말이나 하구, 경수 미워!”
네, 제가 죄인입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생각하고 입이나 맞춰주세요.
용감하게 입술을 찾아 돌진하기를 몇 번, 내가 더 이상 뽀뽀하지 않자 종대가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떴다. “좋아해.” 내 말에 종대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눈꼬리, 입꼬리, 말꼬리, 하나하나 살피는데 참, 너는 어쩌면 이렇게 안 예쁜 데가 없냐. 내 짝꿍이라 예쁜거냐 아니면 예뻐서 내 짝꿍인거냐.
가만히 눈만 맞추고 있으니까 종대가 뺨을 붉혔다. 손을 올려 뺨을 감싸니 과연 뜨끈뜨끈하다. 확실히 알 것 같다. 아무리 빙하기가 어쩌구 일식이 저쩌구 해도 우리는 괜찮을 거라는 걸. 내 짝꿍이랑 함께 있으면 참으로 스릴이 넘쳐서 지루할 틈도 없을 거고, 계속 찡찡거림을 듣느라 외로울 틈도 없겠지. 하루하루 평온할 거라고는 말할 수 없어. 하지만 하루하루 행복하리라는 건 장담할 수 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눈부셔서 눈을 감으니까 입술에 말캉, 하고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
침대에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럭저럭 돌아다닐 수 있는 날씨지만 그래도 우리는 집 안에서 만화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뽀뽀를 했다. 추우니까 자꾸 졸려. 하품을 하는 종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흘러내리지 않고 고여 있는 눈물을 쓱 닦아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화 주제를 꺼냈다. 왜 아직도 우리가 열다섯인지 모르겠다. 후다닥 5년이 지나가서 우리 아기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우리 유전자 조합은 진짜 완벽할 거야, 종대야.”
“나두 알아. 그나저나 키는 날 닮아야 할 텐데.”
“…….”
“아, 기왕이면 어깨도.”
“…진짜 너무하네.”
“왜애.”
“종대 미워.”
미워. 아주 미워 죽겠어. 미움을 가득 담아 옆에서 꾸물대고 있는 종대를 껴안았다. 그래놓고도 미움이 넘쳐서 토실한 엉덩이를 토닥여줬더니 종대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경수 미워. 저리 가.”
뭐라고 하던 나는 종대를 좀 더 꼭 안았다. 따듯하고 포근하다. 이대로 겨울잠을 자도 좋을 것 같아. 꿈속에선 해에 그을린 너와 테니스라도 칠까봐. 내일도 해는 뜨지 않을 거고 눈이나 내리겠지만 괜찮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고 내 옆에는 태양이 뜰 테니까.
잘 자. 내일은 더 예뻐해 줄게. 속삭임에 지구의 온도가 몇 도 상승한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올리고 있는 내 예쁜 짝꿍 덕분에 오늘도 나는 따스한 꿈을 꿀 예정이다.